엘 그레코(1541~1614)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던 지중해의 크레타섬에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긴 이름을 받고 태어났다.
아이콘(비잔틴식 예배용 그림) 화가로 출발했으나 23세에 베니스로 이주했다가 로마와 마드리드를 거쳐 1577년에 스페인 톨레도에 정착했다.
이후 약 40년간 스페인 화가로 활동하면서 긴 이름 대신 ‘그리스 사람’이란 뜻인 ‘엘 그레코’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리며 당시 유럽 미술사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풍의 그림에서 과감하게 탈피, 종교적인 주제를 살리면서도 새로운 매너리즘의 화풍을 주도적이며 독창적으로 펼쳤던 화가다.
이 그림은 교회에서 주문한 공식 초상화로 고위직에 있는 성직자의 종교적 열정과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초상화다.
오늘날에도 안경은 부드럽고 지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즐겨 사용되지만, 이 작품 속에서도 당시 스페인에서 마녀사냥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종교재판관인 추기경의 안경을 낀 모습은 매서운 시선을 검은 테로 다소간 분산시키면서 권력자의 지적인 이미지를 돋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필요할 때만 잠시 코에 걸치던 코안경이 유행하던 당시에 이례적으로 귀걸이안경을 쓴 모습을 통해 추기경의 진취적이면서도 엄정함을 지키려는 이미지를 담고자 했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경험한 환상을 기술한 성경의 내용을 묘사한 그의 대표작이자 유작이기도 한 작품이다.
예수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와 천국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에 천사가 나타나 우선 흰옷을 나눠주는 순간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무릎을 꿇고 팔을 벌린 성 요한의 모습이 엄청 크고 길게 그려져 있다.
당시 매너리즘의 화풍이 매우 뒤틀리고 변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긴 했지만, 그만의 그림이 더욱 유별스런 것을 보고 ‘그가 시각장애(난시)를 가져 인물을 길고 일그러지게 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후에 폴 세잔과 피카소까지 이어져 그를 모더니즘 회화의 선지자로 알려지게 했다.
출처: 옵틱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