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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일찍 찾아온 추위때문인지 노인의 굽은 허리춤으로 스민 스산한 바람이 스친다.
세상에는 합법이지만 부당한 일이 적지 않다. 반대로 범법이지만 사회적 정서로는 정당하고 동정을 받는 사안도 있게 마련이다.
요즘 갑과 을에 대한 이른 바 갑론을박(甲論乙駁)이 회자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갑과 을’은 계약의 두 주체를 가르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한자이다.
지위가 높은 계약자를 ‘갑’, 지위가 낮은 계약자를 ‘을’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사회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센 쪽이 ‘갑’, 반대쪽을 ‘을’이라고 여기게 됐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는 계약균등 관계도 많다.
사람이란 욕망의 덩어리다.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 싶고, 성적 충동에 온 몸을 맡기고 싶은 야생 그대로의 욕망의 덩어리다.
그러나 욕망을 거부하는 지각이 양심이라고 본 것이다. 왜 그 욕망을 거부해야 되며 거부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으며, 따라서 타고난 욕망대로만 행동해서는 그러한 삶의 틀 속에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가 정의하는 양심이란 후천적인 자각을 뜻하며,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이며, 더불어 사는 지혜인 것이다.
최근 갑을 공방전을 타고 쏟아져 나온 을의 생존 전략서들이 하나같이 몸을 낮춰 갑의 환심을 사는 법에 대해 열변할 때 을의 당당한 처신이 아쉽다. 따지고 보면 을의 비애는 자초한 바도 없지 않을 성 싶다. 서비스 제일주의, 비굴에 가까운 과잉친절은 누구의 탓인가.
그 지나친 낮춤이 갑의 횡포를 야기하고 직업의 귀천의식을 고착시킨다. 자연계에서는 풍화와 침식에 의한 파괴 작용도 있고, 또 지각변동에 의한 융기작용도 있는 것처럼 인간 세상에도 춘추 좌씨에 있는 것처럼 꾀 있는 새는 나뭇가지를 골라 앉는다는 것이다(良禽擇木).
인간은 사물을 보는 눈이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대로 보려면 눈을 떠야한다. 사물을 있는대로 보다 다르게 보려면 눈을 좀 더 떠야하고, 있는대로 보다 더 훌륭하게 보려면 더 떠야한다” A. 차도가 한 말이다.
언뜻 우리는 판매자, 구매자 관계에 있어 위험 부담이 피차없는 소통관계가 원만히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노동, 일, 작업 등으로 불려지는 워크(work)는 돈을 위해 사고파는 노예적 관계의 노동이 아닌 것이다.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며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려 애쓰는 일자리다.
천재는 꾸준한 노력을 못 이긴다. 대기만성이 맞는 얘기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이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이다. 꾸준함이 재주를 이긴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옵틱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