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의견이 교환되고 뜻이 통하려면 도리나 조리에 밝아야 한다. 생각을 나타내고 뜻을 표현하는데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번 안경사 관련 의료기사법 개정(改訂)에 대해 참여했던 인사들을 만나 현장에 있었던 소감과 같이 일했던 것에 대해 물으면, 어떤 분은 ‘글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원로는 ‘아니! 맞다!’로 단언하는 언질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딱 잘라 사실과 진실에 어긋나지 않는, 단언할 수 있는 기억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기록을 위한 증거취합(證據聚合)에 등한한 원인을 첫째로 꼽을 수 있겠고, 증빙될만한 것에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타성의 탓도 있지 않나 싶다.
2002년 6월, 금강산을 해로를 통해 다녀온 이후 육로로도 다녀왔다. 신계사(神溪寺) 대웅전이 복원되었다고 해서 또 가게 됐다.
식당에서 특미로 속 채우고 나올 때 꼭 챙겨 나올 것은 식당의 명함이다. 귀향하여 가방 속에 있는 증거물을 꺼내 순서대로 일기장에 붙여 놓으면 훌륭한 답사기가 된다. 흔히들 서울에 간 사람보다 안 가본 사람이 말다툼에서 이긴다고 증거가 없으면 말이 막혀 지는 것이다.
안경업계에서 자영업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재산 있는 원로라는 분의 말에 어떤 것이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그의 말이 옳고 타당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향력 때문에 잠자코 있을 뿐이다.
정글에서는 언제나 사자(獅子)가 옳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정글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이르고 늦고 시간문제이지 언젠가는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불분명한 것에 대해 잘라 말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속설에 떡은 돌수록 떼어지고 말은 돌수록 보태진다고 한다. 사실을 도외시하고 진실을 외면한 ‘우김’은 바로 교만(驕慢)이다.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뽐낸다고 탓하지 않는다. 문제는 교만이 상대를 무시하고 경시한다는데 있다. 외교관들의 언사에는 ‘No!’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may-be…’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초대 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이원순(李元淳) 옹은 백수(白壽)도 넘기고 백세(百歲)도 넘게 사시다가 서거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간곡하게 남기고 가신 말씀은 ‘글쎄’와 ‘쯤’이었다. 수(數)를 따져야 하는 경제인이 확실치 않은 말을 쓴 것은, 단언을 피한 것이고 ‘쯤’이란 정도의 접미사를 애용한 것도 인간은 완벽한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지만…. ‘글쎄올시다’맞는 말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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