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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한 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달인 동시에 무더운 여름에 들어서는 계절의 초입이기도 하다.
인간의 시간관념은 달력의 물리적 시간과 함께 어떤 의미가 새겨진 기념일적(紀念日的)인 날도 많이 있다. 후자의 경우, 6.25 전쟁과 6.29 민주화 선언이다.
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서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발언은 중국 정부의 정론(定論)이다.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6.25 참전 중국병사들과 좌담에서 조선내전이 발발한 후 미국은 거리낌 없이 파병했고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38선을 넘었다며 중국의 참전은 제국주의 침략자가 중국 인민들에게 강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주장을 요약하면 6.25는 남북한 간의 내전인데 여기에 미국이 개입해 중국 국경까지 넘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중국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극비문서를 통해 6.25는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긴밀한 상의 끝에 소련, 중국의 승인 아래 감행한 ‘기습남침’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은 1990년대 초까지 중국교과서에 6.25는 북침이라고 기술하다가 1992년 이후 1950년 6월에 6.25 전쟁이 터졌다고 바꿔 썼다. 소련 극비문서 공개 등으로 6.25 북침설을 계속 주장하기 힘들게 되자 입장을 바꾼 것이다.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천문학적인 경제 피해를 남긴 전쟁이다. 그 후유증으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과 1000만 이산가족의 고통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리 민족으로서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되는 비극적인 전쟁이다.
내 개인적인 6.25전 체험을 말하면 50년 6월 24일 밤에 평양에 있었다. 사이드카 소리 요란하게 꼬리를 문 부대가 측차(側車)칸에 중기기관총을 탑재(搭載)하고 마치 금방이라도 쏠 것처럼 중기의 핸들을 잡은 인민군 병사를 봤다.
이튿날 집에 가려고 평북 정주역에 내리니 화물차 탱크에 두꺼운 덮개를 씌웠지만 내용물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평북선을 타려고 2시간 넘게 기다리는데 그 사이 탱크 기차는 북으로부터 계속 내려오고 있었다.
부산 서면 중심가는 로터리를 중심으로 한다. 당시 은아극장으로 진입하는 이면도로는 중앙도로가 데모대로 꽉꽉 메웠기 때문에 자전거 한 대도 지나갈 수 없었다.
양쪽 옆에 오고가는 아주머니들이 데모대에게 우유와 빵을 전달하는 광경을 보았다. 어느 점포나 한결 같이 셔터문은 머리를 넣을 수 있을 만큼 틈을 열어놓고 있었다.
최루탄과 진압부대에 쫓기게 되면 얼른 들어오라는 비상구였다. 이런 날이 지속되었고, 6.29 민주화선언이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