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어야 글을 쓸 수 있다. 이것은 참이다. 누구도 부인 못하는 진실이다. 어릴 때부터 뜻 모르게 책과 가까이 하다보면 수많은 글 앞에 서게 된다. 마치 인간이 자연 앞에 서면 왜소해지는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독서는 선비의 취향과 도락(道樂)으로 여기는 것을 금기시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궁구(窮究)를 추구하는 필수의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공부는 타의반 자의반에서 시작된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 재미가 붙어 따라간다. 취미는 재지(才智)와 마찬가지로 훈련되고 빛을 내게 된다. 독서는 책을 읽는 사람의 사고범위를 넓혀주는 것이다. 사고의 전반적인 기반이 독서로써 마련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수준은 국민들의 독서량에 정비례한다고 한다.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만이 변화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사고하고 자기개발의 의지도 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남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정현들의 고귀한 경험과 정신의 주옥같은 진리도 영구히 우리 마음에 맺힐 때 맑은 정신과 희열이 우리를 감싸준다.
5~60년대만 해도 독서법에 대한 서책이 출간된 게 별로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독서기술을 비롯한 옛 분들의 독서법을 소개한 ‘오직 독서뿐’을 보면 명사들의 각기 특이한 책읽기가 있지만 공통점은 남독(濫讀)이 아닌 정독(情讀)이었다. 일석 이희승 선생께서는 한 번 읽고 그만둘 책은 한 번도 읽을 가치가 없다고 명저(名著) 선택을 권유했다.
흔히 인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인간에 대한 탐구를 통칭하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서책들을 필자는 탐독했다. 알려진 명저는 독서의 필수 통과의례로 여겨 반드시 읽고 지나갔다.
이러한 서책을 읽기에 앞서 신문과 잡지를 기본으로 읽었다. 50년대 발행한 사상계는 폐간될 때까지, 그리고 1928년 절판되었다가 복간된 신동아에 이어 월간 중앙, 월간 조선 등 그리고 현대문학, 자유문학 등도 열독했지만 요즘은 그만둔 지 오래된 연초 발간되는 부록만 구입하다가 그것도 그만두고 신문에 독서가이드에 난 것만 선택하여 구매 숙독하고 있다.
‘책은 소유가 아니라는’ 운주 하연승 시인의 충고에 색연필로 치던 방선(傍線)을 연필로 대신하고 있다. 다음 읽을 분에게 지울 수 있게 한 것이다. 방선 친 곳은 다시 읽기 위해서 이고, 그 다음은 초서(抄書)하여 차기(箚記)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노트에 따로 적어 놓는다.
천재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배운 걸 다 아는 수재도 있다. 필자는 곤이지지(困而知之)로 알게 되는 둔재이다. 둔재가 해야 할 공부는 예습, 복습의 반복뿐이다. 둔하지만 새겨 정독하게 되면 많은 어휘들이 머릿속에 쌓이게 된다. 그러므로 책은 사람들이 생각을 서로 공유하고 배우고 반성할 수 있는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의 장이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임에 틀림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