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사명을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그 순서로 정보성(Information), 계도성(啓導性), 교육(Education), 오락(Entertainment) 등이다.
‘말(言)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인쇄술의 발달로 입말과 글말이 나뉘긴 했지만 본디 소리가 말이고 말이 글이었다. 말에는 숨이 있고 글에는 혼이 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정의했다.
언어의 혼란은 정신세계의 파탄을 의미한다. 2001년에 발간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재경 옮김)’에 나오는 취재, 보도의 원칙이다. 책이 필독서가 된 것은 수많은 언론인의 고민과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권력의 감시자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다.
확인한 만큼 기사를 써야한다. 단정보도를 하려면 그만큼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오류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반론권을 줘야하며 취재원은 최소한 실명으로 써야 한다. 규율을 거수화한 경우도 있다.
사실의 규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투명성의 정신이다. 독자와 진실한 관계를 원한다면 취재과정을 공개해야 한다. 취재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디까지가 확인된 내용이라고 밝혔을 때 독자는 그 기사를 더 믿게 된다.
지난번 2회에 걸쳐 ‘예와 법’이라는 제목으로 언급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더 간명하게 적는다면 예(禮)는 질서의 규범으로 사회생활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지는 위계질서(상하, 전후, 좌우). 의(義)는 한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 사사로움 없이 공정한 것. 염(廉)은 물욕, 권세욕을 탐하지 않고 매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세. 치(恥)는 양심을 근본으로 한 정의감 속에서 불의를 보면 치욕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의염치는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행동의 기본인 것이다.
현명한 리더는 조직 내의 여론과 안팎의 평가를 가감 없이 전해주는 잔소리꾼을 곁에 두고 활용한다. 자신을 향한 비판과 냉정한 평가를 자성과 신독(愼獨)의 재료로 삼는다.
반대로 우리가 제일 잘했다는 자화자찬이나 내 판단이 옳았다는 자기 최면으로 자리가 주는 중압감을 이겨 내려는 사람도 있다.
조직이 자기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독선이거나 아집인 경우가 많다. 실패한 동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의견은 자유롭게 펼칠 수 있지만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어두운 열정으로 무장한 세력이 걸핏하면 무책임한 주장을 늘어놓는 이런 거짓선동이 위력을 발휘하는 나라나 조직단체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조차도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에 맞춰 다르게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굴뚝을 구부리고 섶을 옮긴다는 한서(漢書)에 나오는 고사, 곡돌사신(曲突徙薪)의 해석은 화를 미연에 방지하라는 취지로 해석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여러 교훈이 담겨 있다.
뻔히 보이는 길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의 어리석음, 본질을 놓치고 곁가지만 신경쓰는 사람의 미욱함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