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과거를 묻는 것은 부질없다. 양적인 길이이지만 의미의 길이기도 하다. 시간이 의미가 될 때 시간은 언제나 현재가 되고 영원이 된다. 시간은 끊임없이 의미로 창조해 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내어준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의 내일은 날마다 좋은 날일 수밖에 없다.
봄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천문학적으로는 춘분부터 하지까지이고, 기상학적으로는 3월부터 5월까지다.
당시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이 현대 왕 회장에게 하나하나 빈틈없이 따져 들어가니 왕회장 왈 ‘시류에 의해서 그랬노라’라고 한 발언이 기억난다. 시류(時流)란 자연적인 흐름의 풍조(風潮)와 인간이 이뤄놓은 인위적인 제도적인 풍조도 있다 하겠다.
자신이 과거와 단절하는 일은 시간의 연속성으로 설명하는 역사 서술의 기본원리를 수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독일 문화학자 얀 아스만 부부는 역사란 시간이 아니라 기억,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적 기억이라고 주장했다.
내 삶의 고민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봐야한다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과거를 통하여 미래를 예측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우연히 한두 번 계속되고 나면 그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한두 번의 예측에 성공하여 선견지명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게 된다.
사협도 조직의 리더가 바뀌면서 연속성이 끊기고 연구 역량이 사라지는 경향이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보아왔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나중 일의 스승이 될 수 있다(前事不忘 後社之師也). 그릇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난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역사의 거울에는 세 개의 모습이 비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이다. 개인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적인 삶을 의식할 때 비로소 개인이 될 수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면서 또 각자 개인적인 존재이기도 한 인간이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할까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의 권리 또한 타인과 함께 있는 내가 타인과 같다는 전제 아래서, 인간 모두 공통지점에 있다는 자각이 있을 때 개인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원자적 개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과 타자가 조화로운 관계에 놓이기 위해서 개인의 권리가 자유가 어떤 조건에 놓여 있어야 하는지 연구과제다.
새로 출발하는 임원진은 재임 중 무엇을 남긴다는 ‘한건주의’가 아니라 금년에 계획하는 이 일이 자신의 퇴임 후에도 계속 지속될 만큼 조직을 위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과욕 없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시작과 끝’을 함께 생각하고 일일신(日日新)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면 된다.
공익을 우선하는, 매일같이 자기 인생을 검문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