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체를 삐딱하게 오른쪽으로 눕힌 사선(斜線)의 글씨체는 김정일이 그렇고, 그 아들 정은이도 애비를 닮아 그런지 우주 로켓 발사 승인 서명이나 날인(捺印)때 쓴 글씨체가 부자간에 신통히도 닮은꼴의 글씨체여서 놀랬다.
뭔가 켕기고 부족함이 있어 손짓 발짓 불필요한 제스처는 심리적 콤플렉스의 반사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늦게 서예에 입문했다고 해서 만(晩)자를 이름에 넣었다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초여름 때 부산에 사는 부채장수가 호남의 전주에 가 접이부채를 사갖고 귀향길인 갈재의 당마루에 이르러 무게는 나가지 않지만 부품 있는 짐이라 어깨에서 풀어 놓고 왕소나무 그늘 아래서 한숨 눈을 부치고 있었다.
서예가로 이름은 불리지 못했지만, 필목장수 못잖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지니고 다니는 아마추어에 철저한 소인(素人)의 눈에 미친 짐 꾸러기 속이 맨살의 부채가 쌓여 있지 않은가.
먹을 갈아 붓을 휘둘러 깊은 산간 바위 밑에 쪽배에 앉아 선비가 낚시를 드리우는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나비가 꽃을 찾아 사뿐 나르는 풍경이 펼치기도 하고, 죽지상혼(竹紙相婚), 생자청풍(生子淸風) 등 그림과 글귀가 빈구석 없이 부채마다 채워져 있었다.
좀 이른 오수를 즐기다 눈 비비고 일어난 부채장수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어떤 놈이 글쎄 흰 부채 속에 시커먼 먹칠을 해놨으니 이를 어쩌나, 버릴 수도 없고 먹칠해 깔아 놓은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 넣고 귀향길에 올랐다.
봄은 남국(南國)을 타고 올라가는 법. 먹칠한 부채를 가득 싸지고 안동에 닿았다. 저자 입구에 부채를 펼쳐 놓았다. 찾는 손님의 발길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런데 해질 무렵 부호(富豪) 차림의 중국인이 부채를 쥐어보고 부쳐보고 하지 않은가.
옳거니 임자 만났다 싶었다. 한 개를 높이 들며 얼마냐는 것이 아닌가. 이때 장사꾼 눈치 얹혀서 먹칠한 값을 얹혀 불렀다.
이게 또 웬 일인가? 다 쌓아 짊어지고 따라 오라는 것이다.
전대 속에 두둑한 은전(銀錢)의 감각을 느낄 사이도 없이 고향으로 달려가기 바쁘게 먹칠한 장본인 찾기가 우선이었다. 노령산맥을 단숨에 넘어 먹칠한 장본인을 용케도 찾을 수 있었다.
타국에서 사는 청심환 등 귀하디귀한 선물 사갖고 배려하며 또 한 번의 먹칠을 부탁해 올렸다.
전과 다름없이 한 짐 짊어지고 한 걸음에 안동으로 건너갔다.
전(廛)을 펴자마자 그때 그 부호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런데 그 부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리고는 빈손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기회를 어찌 놓치랴? 돌아서는 이유나 알자니까 ‘저번 그림은 아무런 사심 없이 자연스럽게 그린 그림이지만, 이번 것은 돈 냄새가 나는 그림이웨다.’
부채그림의 주인공은 창암 이삼만 선생의 그림과 글씨였다.
그림 속에 순수성이 담겨 있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