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란 말은 주사위 놀이나 룰렛 게임에서 사용되며, 이때 사람들은 어떤 면이 나올지를 예상하기 위해 확률 계산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거식적인 놀이가 ‘우연’에 좌우되는 것은 순전히 충분한 정확성을 가지고 주사위나 공을 던지는 일이 단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결과의 불확정성을 갖춘 투척기계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룰렛 게임에서의 불확정성(essentielle)이란 순전히 조작상(operaticnnele)의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해두자.
많은 현상에 대해서 우연이라는 개념과 확률 계산을 순전히 방법론적인 이유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에 문제가 되는 우연도 역시 단순히 조작상의 우연일 뿐이라는 것은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단순히 조작상의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다른 경우들도 있다. 예컨대 ‘절대적인 우연의 일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경우, 즉 완전히 서로 독립적인 두 개의 인과계열이 서로 교차하여 일어나게 되는 사건의 경우가 그런 경우다.
의사 K씨가 긴급호출을 받아 어떤 새로운 환자의 집으로 불려가는 도중 배관공 L씨는 옆집 지붕을 수리하고 있던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의사 K씨가 그 집 발치를 지나가려는 찰라 배관공 L씨가 부주의로 인해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떨어뜨리게 되고, 이 망치가 떨어지는(결정론에 의해 정해진) 궤적이 지나가던 의사의 동선과 한 지점에서 겹치게 되어 결국 의사는 머리가 박살나서 죽게 된다.
이때 우리는 의사가 운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본성상 전혀 예측이 가능하지 않은 이런 사고를 두고 달리 무슨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이 경우의 우연(운)은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두 개의 사건 계열이 한 지점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사고를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순전히 우연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필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거시적인 차원인 유기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알베르 카뮈는 ‘우연은 왕자’라고 했다.
재미교포 교수인 김은국 씨의 ‘심판자’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K대령은 혁명(쿠데타)을 완수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시청 골목 어딘지 모를 곳에서 탄환이 날아와 지프차 앞자리에 앉았던 K대령의 귀뿌리를 정통으로 뚫어 선혈이 수도꼭지 세게 틀어 놓은 물줄기처럼 낭자하여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총알은 공교롭게도 그의 부대 사병이 총 수입을 하다가 오발된 것이 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경우 우연인가? 필연인가? 어찌 알랴….
인간에게 신(神)은 20가지나 되는 숫자를 적용시킨다고 한다. 우연이 그중 하나다. 이젠 ‘우연 이바구’는 그만하고 ‘지식과 윤리’라는 장으로 넘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