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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 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일이다.
올해로 115주년을 맞는「독립신문」은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선생이 정부자금을 지원받아 창간해 19세기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초로 「독립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한 서재필 선생은 근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각자인 동시에 독립운동가, 의사, 언론인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해방 직후인 1948년 6월 조선여론협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전체 3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는 민중들에게 뛰어난 정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공적과 함께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나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맺었던 점은 오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그가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에게 부탁한 일과 친미적 성향을 지닌 독립신문의 시국관 등에 대해서는 일부 가혹한 재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그가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히 연락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한 점,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 제출한 점,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한 것 등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한 그의 유해는 1994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공로를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 선생은 이 때부터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평생 학자풍의 라운드 림의 안경을 즐겨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