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먹는 데는 맛과 영양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열량도 수반되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식물성보다 동물성 먹거리가 영양가가 높다.
우리들이 쉽게 접하는 육류 먹거리는 닭, 돼지, 소의 순서이다. 우리는 과학적 측정 이전의 속된 말로 닭은 하루, 돼지는 3일, 쇠고기는 1주일을 잡는다. 이른바 허기 없이 속이 든든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돼지의 삼겹살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삼겹살이란 돼지의 갈비에 붙은 살로서 비계와 살이 세 겹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삼겹살이란 것.
그런데 맛있고 고소한 삼겹살을 만들려면 일반적으로 흔히 농가에서 기르는 돼지사육법으로는 안 되고 특수한 사육이 필요하다. 어린 새끼돼지 때부터 성돈(成豚)이 될 때까지 사육하는 일이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육자는 갓 시집왔는데 어떤 운명인지 신랑이 급사하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여인이 젖 뗀 새끼돼지를 사다가 정성껏 밥 주고 물 주어 살이 통통하게 쪄 몸값을 하여 가져간 곳이 상감이 계시는 궁전이란다.
신랑 없는 수심(愁心)을 애오라지 돼지새끼에게 쏟아 정성들여 키우다가 어명으로 돼지를 잡으러 올 때에 하루 한 끼를 건너뛰고 잡혀가지 직전에는 두 끼를 거른 후 보내면 돼지의 기름기가 딴딴해지며 줄어들어 고소한 비계 맛이 나 임금의 밥상인 수라상에 올려도 칭찬받는다는 것이다.
돌아간 애틋한 사부곡의 정(情)이 돼지에게 쏠리어 탐스럽게 돼지는 사육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돼지를 걷으러 갈 때 굶겨 비계가 줄어들면서 딴딴해지니 여느 돼지의 비계보다 고소하고 딴딴해 한층 맛이 날 수밖에….
헛된 개가(改嫁)의 엄격한 제도 때문에 삼겹살의 진미가 수라상에 가득 채워진다 하더라도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1906~1966)의 「먹거리타령」수필집에서 일부 초록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몇 가지 슬픈 데가 있다.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고 보내야 하는 슬픔이 첫째이고, 몸이 몹시 아픈 것도 진짜 슬픔이며, 배고픈 것도 진짜 슬픔이다.
배고픈 경험이 없으면 이 슬픔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은 들을 수도 없는 말인즉 ‘개떡 같은 소리하지 말라’의 개떡은 어떤 떡인가. 두부를 뜨고 나서 남은 찌꺼기를 주물러 만든 떡 같이 생긴 먹거리가 개떡이다. 참 맛이 없다.
하지만 요기(療飢)와 열량은 보충된다. 음식보고 타박하고 투정부리지 말라. 끼니를 때우지 못해 하는 말이 아니다. 아끼라는 뜻이다.
야외에서 음식 함부로 버리지 말라. 그것은 크나큰 죄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이하는 인간, 다 좋다. 인간의 문화는 놀이로부터 결국 경제나 정치 같이 실생활, 그러나 유희 못잖게 지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