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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中央)은 사방의 중심이 되는 곳, 한 가운데를 말하며 추요(樞要)한 위치를 일컫는다. 서울은 해방 후 우리나라 수도의 지명이다.
고려 우왕(禑王, 1358)때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성계는 형식적이지만 창왕(昌王)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조선 태조 2년(1394) 개경 송도로부터 한성부(漢城府)로 이전, 조선 왕조의 도읍이였던 곳이 융히 4년(1910) 경성부(京城府)로 불리워 오다가 해방이 되면서 오늘날의 명칭인 서울이 되었다.
89년 7월 16일 부산 대청동 소재 카톨릭센터에서 안경사법 반대대책위가 경기•강원•제주•경북 등 몇 군데를 빼곤 서울을 비롯해서 각 지역 안경인회 임원들이 참석하여 전국 규모의 대책위의 결정을 보였다. 그런데 이보다 이틀 앞서 서울에서도 대책위가 구성되었다.
날짜로 보면 7월 14일, 이틀 앞서 모임을 갖자는데 어찌 부산이 9•28궐기대회의 기천이 되었는가? 반문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서울 집회는 전국 규모가 아니고 다만 서울안경인회, 다시 말하면 지역적 규모를 벗어날 수 없고, 부산은 지방이지만 전국 규모의 집회라는 의미와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유사한 집회도 있다. 90년 7월 말 가칭 안경사협회 창립의 첫 봉화를 올렸다. 안경사협회 준비위의 첫째로 중요한 문제는 안경사회 정관 초고 작성 문제였다.
중앙과 각 시도 안경인회들이 나름대로 이 초안을 제출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우리 부산에서도 정관 초고를 작성함이 떳떳하지 않겠느냐는 의제를 필자에게 위임하여 안경인협회의 정관과 여느 의료기사법들의 정관을 참조하고 정관 작성의 취지문을 서두에 실은 초고를 완성, 김태환•정원석•권봉우•이선춘 그리고 필자 등이 정관 초안을 신중히 심의한 후 정원석 부회장에게 위임하여 준비위의 일을 마쳤다.
이에 뒤이어 중앙에서는 90년 8월 16개의 가칭 각 시도 안경사지부가 모두 결성되었다. 정관 초안 작성에 있어서는 16개 시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의견을 최종 수렴코자 9월 22일엔 대한안경인협회에서 관심있는 모든 안경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관설명회를 가진 바 있다.
이렇게 작성된 정관은 다가오는 9월 28일 (가칭)대한안경사협회 창립총회에서의 조창남 위원장을 위시해서 이강훈 부위원장과 위원 12인으로 구성되었다.
89년 11월 28일 의료기사법이 개정된 이래로 수많은 내•외적 갈등과 마찰을 극복해 나아가야했기 때문에 더욱 뜻깊다 할 수 있겠다.
모임과 집회의 문제는 서울과 중앙이 규모에 따라 서울도 하나의 지역으로 될 수 있고 첫 봉화를 울렸다고해서 중앙처럼 선축을 잡을 수는 없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