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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은 한일 합방 후 중국에서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한국과 중국인의 협력에 힘써왔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법무총장으로 서 국무총리 대리 및 외무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임시정부 내 통합을 위해 노력한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해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가족들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오른쪽 눈의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사시(斜視)가 되었다. 사시는 우리말로 ‘흘겨보기’이고, 이것을 한자로 바꾸면 ‘예관(紹觀)’이 된다. 그때부터 신규식은 자신의 호를 예관으로 정했다.
이어서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을 꾀했다가 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게 구명된 선생은 이듬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후 1912년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 등과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과 협력해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한국혼>과 시집<아목루>를 저술한 선생은 <한국혼>에서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라고 하여 온통 나라를 생각하는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