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안경사법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 김정민 대표 “안경사는 장사꾼 이미지 탈피해야 미래 전망 밝아”
▲ 1986년 안경업계에 뛰어든 이후 김정민 대표는 그간 89년의 안경사법 제정 관련 비대위 위원, 강서구분회 분회장, 서울지부 총무이사, 중앙회 총보이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안경계의 건전 발전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3천명이 넘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스승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는 증자다.
증자의 지극한 효심을 스승도 감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자는 임종 직전에 제자들에게 “증자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에 상처 하나가 없다”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은 터럭 하나 살갗 한 점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공자의 사랑만큼이나 안경사법 투쟁 당시 비상대책 위원으로 선배 안경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새빛광학/㈜그린광학 김정민 대표.
당시로서는 앳된 20대 후반에 선배들의 부름을 받고 비대위 위원으로 참여해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8척(184cm)이 넘는 큰 키에 웃음마저 넉넉한 참 안경인이다.
김 대표가 안경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대학에서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부터다.
왠지 모르게 안경의 매력에 이끌려 아무런 경험도 없는 그가 서울 강서구에 개원한 곳이 새빛 안경원이다.
그리고 2년여간 정신없이 안경에 침잠할 무렵 일명 안경사법을 만들기 위해 안과의들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안경인협회의 부름을 받고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김정민 대표는 “이제 막 사회에 나온 20대 후반의 앳된 나의 무엇을 보고 막중한 임무를 맡겼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며 “솔직히 그때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나를 믿고 역할을 맡겨준 협회 집행부와 선배님들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으려고 법 개정을 위해 1년간 열심히 뛰었다”고 웃음 지었다. 갈수록 약화되는 안경사의 자긍심 키워야
김 대표는 25년 전 당시를 되짚으며 자신이 건의한 제안이 실효성을 거둔 것에 여전히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바로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밑바닥부터 설득하자는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안경사법이 안경인들의 뜻대로 제정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 대표는 전국 각지의 분회장들과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안경사의 업무범위 확대에 대한 정당성을 열심히 설명했다.
안경사가 안과의사에게 종속된 의료기사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준보건의료인으로서의 역할과 전문성을 설명하며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1989년 12월에 제정된 의료기사법개정법률(법률 제4180호)이 공포되는 초석이 되기도 했다.
김정민 대표는 “89년 9월에 서울 목동 88체육관에서 개최한 안경사법 반대 범안경인전국결의대회가 법 개정을 이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각 지역의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시킨 수많은 선배 안경사분들의 노고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안경사제도가 일부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 전국을 찾아다니며 안경사제도 개정에 직접 참여했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회고했다.
김정민 대표는 대책위가 해산된 이후 1993년에 강서구분회의 총무이사를 시작으로 94년에는 강서구분회 분회장에 취임해 회원들의 복리증진과 업계 봉사에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이때의 열성적인 분회장 활동이 계기가 되어 곧바로 서울지부 총무이사를 거쳐 중앙회 홍보이사에 선임되면서 안경사법 제도 정착에 일익을 담당했다. 김 대표 “업계 발전 위해 의미 있는 일할 터”
김정민 대표는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50대 중반이다.
20대 약관의 나이에 안경사법 제정과 제도 정착에 헌신한 그는 현재의 척박한 안경사들의 현실을 바꾸는데 미력이나마 헌신하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그동안 사회 각계 각층에서 쌓아온 인맥을 활용해 안경원의 건전발전과 매출 향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김 대표는 안경원에 입문한 이후 10여년간 호주에서 안경원을 운영한 때를 제외하고는 협회 임원으로 봉사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안경사 후배들을 위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고, 백의종군해서라도 더 이상 안경업계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다.
소매 안경원과 안경렌즈 제조공장, 유통 등 안경업계의 모든 분야를 경험한 자산을 밑받침 삼아 업계 발전에 헌신하고 싶은 것이 그의 뜻이다.
안경업계의 발전과 변화를 위한 일이라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고 함께 할 수 있다고 밝힌 김 대표는 “10여년만에 호주에서 돌아와 안경업계가 너무 척박하게 변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지금까지 안경 하나만 알고 살아온 안경사로서 지금의 업계는 한마디로 기막힐 상황”이라며 “안경사 후배들이 현재의 시장 여건을 못견디고 업계를 떠나기보다는 변화에 앞장서 멋진 안경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90년대 안경사 보수교육의 핵심은 상도의 정립 등 업계 건전발전에 주력한 반면, 최근의 안경사는 근시안적인 사고로 안경만 파는 장사꾼으로 전락한 풍토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89년 개정된 안경사법은 안경사가 보건의료인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자고 만든 것인데 그동안 안경원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과당경쟁이 일상화되고 안경사로서 자긍심이 약화된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안경원과 광학기기 업체를 운영중인 김 대표는 업계 전반에 산적한 문제의 가장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보다 정확한 가격 정찰제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안경류의 가격은 얼마라고 정해지지 않아서 보통 50%, 30% 할인한다는 광고가 일반화됐는데, 이러한 과도한 할인이 오히려 소비자에게 가격불신만 심어주는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며 “가격을 과도하게 할인해 주는 것보다는 정확한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소비자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김정민 대표는 물이 100도가 되어야 끓어오르듯 안경 판매도 성실과 끈기만이 고객에게 신뢰를 얻는다고 했다.
제품이 곧 판매자의 인격이고, 흉내만 내는 B급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자는 김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서울의 포스코센터 1층 화장실에 붙어있는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기기를 원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경구를 떠올렸다.
그는 너그러움 속에서 단단함을, 또 건전한 정신 속에서 굽히지 않는 패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경사의 꺾이지 않는 저력을 그는 그렇게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김정민 대표 약력
1982년 수원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1986년 새빛안경원 개원 및 운영 1988년 대한안경인연합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재임 1993년 서울 강서구분회 총무이사 1994년 서울 강서구분회 분회장 1996년 서울지부 총무이사 1997년 중앙회 홍보이사 2013년 새빛광학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