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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0일자로 부산 광명당(光明堂) 안경원(眼鏡院)이 셔터(Shutter)를 내렸다. 안경원 하나쯤 ‘문’ 닫느게 무슨 뉴스거리가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부산 소재 광명당 안경원은 이 나라 안경사(史)와 맥(脈)을 같이 했다는데 그 뜻이 여느 일반 안경원과는 다르다.
대한안경인협회의 초대부터 3대까지 협회장을 역임한 故 석정(石晶) 강중화(康中華) 회장은 평남 강서군 초리면 강선리 75번지에서 1907년 12월 4일생으로 태어나 1920년 13세시 도일(渡日), 동경 욱일광학공업(旭日光學工業(株))에 입사하여 안경 렌즈 연마기술을 배우고 익힌 후 10년 후 1930년 귀국하여 평양시 수목리에 동양당 안경을 세워 렌즈 연마공장을 하다가 민족의 비극인 6.25로 장남(세호)만 데리고 남하하여 부산에 정착, 일제 때부터 안경원을 하던 곳을 인수하여 광명당 안경원을 운영케 됐다.
당시 안경업계는 서울안경상공조합과 부산안경상공조합이 나누어져 있던 것을 합쳐 일원화된 후 소망하던 대한안경인협회가 사단법인으로 인가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으로 노력을 다한 석정 강중화 회장은 제3대 회장 시 80년 4월, 서거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소천(召天)하게 됐다.
그러나 안경원의 운영방침은 장남인 세호(世好)씨가 전수 받은 이후에도 석정의 경영방침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경영방침의 유지(遺志)한 기술과 신용이였다. 기술은 과학적 정확성이었다. 일본에서 렌즈 연마기술을 터득한 석정은 일본이 면밀한 공식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안경의 핵심은 렌즈에 있다. 광명당을 거쳐 나간 이른바 안경기사들은 도제제도(徒弟制度)에서 익힌 기술력으로 모두가 기술을 바탕으로 한 안경원 운영으로 착실하게 그들의 점포를 운영해 가고 있다.
낙과(落果)가 음향을 잉태하듯 안경 조제기술은 신용을 잉태한다. 나아가서 신용은 약속을 지키는데서 생성되고 쌓아간다. 신용을 생명과 같이 귀중히 여기고 신용을 밑천으로 경제활동은 물론 일상생활까지도 꾸려나간다.
기술을 바탕으로 한 신용은 오늘날 이른바 마켓팅 전략에도 핵심 이슈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고정관념과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혼재된 단계에 서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하되, 그 목표는 현재와 미래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날을 돌아본다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사념이 아니라 현식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본다는 뜻이 있다 하겠다. 광명당 안경원이란 이 나라 안경계의 발전에 기여한 산실(産室)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고 보내는 마음이 아쉽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