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모든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이라고 했다. 19세기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좁쌀만한 날파리부터 신의 권능이라는 거대한 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불안케 한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거나 신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인류가 불안을 느끼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가장 용감한 자들조차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중요한 차이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다스리는 능력과 기술의 유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절한 두려움은 필요하며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겁쟁이만큼이나 어리석다고 했다. 중세 때는 신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자연은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 요소이다. 우리가 불안이라고 부르는 감정의 복잡하고 모호한, 그리고 오랜 역사를 더듬어 올라왔다. 불안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불안은 뇌기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뇌는 정신을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진 특수하고 독립적인 여러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안이 장애로 정의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경 사람들이 이제 겨우 기본적인 수준의 안전과 삶의 확실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을 때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불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은 의학적으로 이론적으로, 그리고 문학적 묘사에서 온 것들이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반응인 동시에 문화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건강이란 신체의 균형이 맞는 상태라는 것이다. 질병은 그 균형이 흔들렸을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현재 눈에 뜨이게 느끼는 불안은 수중에 돈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이다. 다시 말하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두려운 불안이다. 뿐만 아니라 빚은 불안의 그루터기와 같다.
경제적 위기가 그 무엇보다도 앞선 불안의 요소가 된다. 불안의 바탕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였기 때문이다. 불안의 강도는 외부의 사건과 사람의 능력 차이에 따라 다양했고, 개인의 자기방어 능력보다 큰 위험이라면 어느 것이나 무력감과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다.
정신적인 불안과 병적 형태의 불안, 정신적인 불안과 신경증적인 불안이 다른 차이점은 불안을 일으키는 상황의 불확실성이다.
안경업계의 불안은 시장경기의 예측 불안이다. 우리나라의 역대순 시장경기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사회의 신축에 따른 불황은 어떤 형태에 내용이 들었을까도 살피고 다가올 상황도 정확히 예측해야하는 각박한 현실을 가감 없이 맞아야 한다.
쓰나미(海溢)에 대비한 방벽(防壁)을 보다 높이 올려 쌓아야 한다. 한 마음으로 모인 여럿은 용기의 돛을 올릴 수 있다.
‘다 함께’라는 슬로건 아래 모이면 힘은 더욱 가세된다. 그리하여 사회적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통제하는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제 두려움을 다스리는 계기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