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4일 밤 10시경, 세발 오토바이가 옆 칸에 무거운 중기를 태운 채 무서운 속도로 평양 중심가 도로를 질주했다. 10~11시 경이나 되었을까? 한 시간대였다.
오토바이 탑승인원은 2명으로 모두 군인이었다. 쪽배처럼 붙어 있는 칸은 중기관총으로 금방 쏠듯이 양손으로 중기의 총신을 만지작거리고, 수북이 쌓인 탄띠에는 총알이 치열처럼 박혀있었다. 50m 간격으로 굉음을 내며 내딛는 중기부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평양시민들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지금까지 사실은 ‘진실’의 토대가 된다. 시간은 인간사와 관계없이 생물처럼 살아있는가…? 어느새 6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역사적 진실은 하나지만, 이를 해석하고 평가하고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짐을 우리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우리의 간절함에도 되돌아오지 않는 무심한 것이다.
시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과거를 묻는 것은 부질없다. 시간은 양적인 길이지만 의미의 길이기도 하다.
시간이 의미가 될 때 시간은 언제나 현재가 되고 영원이 된다. 시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내어 준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의 매일은 날마다 좋은 날일 수밖에 없다. 행복이란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적 감정과 평가다. 과학적으로는 호르몬의 총체적 작용이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은 욕망에 반비례한다는 진리를 가르쳤다. 21세기의 영국은 녹색공간이 혈압, 콜레스테롤을 조절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며, 신체를 3배 더 활성화한다고 밝히고 있다.
삶의 작은 공간, 자연, 인간관계의 함수다. 우리에겐 연수(年數)에 맞는 행복의 계수가 있다. 첫째로 정한(精閑)을 낚는 기획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도(道)는 사람이 가야 할 옳은 길이요 덕(德)은 그 길을 갈 수 있는 인간의 힘이다. 그 힘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일컫는다. 이 양심이란 선과 악, 정(正)과 사(邪), 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결여된 인생은 깊이가 없고 사색이 결핍된 생활은 높이가 없는 법이다. 공자는 예(禮)라는 것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예의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경례 행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예의가 있는 순자는 ‘저울은 물건의 준거이며 예는 조절의 준거’라고 했다.
인간의 욕망은 창조적인 원일일 수도, 타락과 파괴의 원천일 수도 있는데 예라는 수단을 활용하여 이런 욕망을 조절하며 모든 백성이 경제생활에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보훈에 대해 받아드릴 자세는 우선 달성 가능의 여부 확인이 우선이고 너무 막연해서도 안 되며 실천되기 어려운 고상한 문제들에게선 멀리하고 고독한 계획도 안 된다.